장마와 황희

  • 등록 2024.07.22 08: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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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가뭄은 오히려 견딜 만하지三月旱猶可(삼월한유가)

사흘만 비 내려도 감당키 어려운데三日雨難堪(삼일우난감)

더구나 열흘 넘게 쏟아지는 장맛비況復更彌旬(황복갱미순)

벽장 속에까지 푸른 이끼 생기겠네綠蘚生壁龕(녹선생벽감)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년∼1638년)의 장마[苦雨]라는 시이다. 얼마나 눅눅하고 힘들었으며 석 달 가뭄이 오리려 견딜 만하다 하였을까? 누구라도 여름철 장마는 견디기 어렵다. 6월의 끝자락부터 시작하는 장마는 7월 하순까지 전선(前線)을 형성하여 한반도 남북을 오가며 무차별로 쏟아진다. 산천을 초토화시키는 집중호우는 폭격을 맞은 듯 꼭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 또한 지구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인간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일 것이다. 특히 “올해 장마는 일찍 시작하고 여름은 덥고 길다.”고 하였으니 서민들의 걱정은 늘어만 간다.

 

무더위에 장마로 불쾌지수가 높아만 가는데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돌려주는 것을 깜빡하였느니 등등’ 터무니없는 말장난은 기가 찰 노릇으로 더욱 짜증을 가중시킨다. 전력 소비의 급증으로 대량 정전 사태가 우려되는 가운데 서민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고사하고 냉장고 속 시원한 물이라도 제대로 마실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가둔 물은 썩고 비밀에 부친 부정부패는 여전히 활개를 치니 어디 마음 놓고 선풍기 바람이라도 맞을 수 있을지 염려되는 여름이다.

 

굵은 장대비를 바라보면 청백리(淸白吏) 황희((1363~1452) 정승이 생각난다. 영의정으로 18년간 재임한 황희는 오직 백성을 위한 일에 몰두하였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賤妾所生)의 천역면제(賤役免除) 등의 훌륭한 업적은 태종, 세종의 가장 신임 받는 재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하여 후세에도 추앙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면 속담에 ‘황희 정승네 치마 하나에 세 모녀가 입는다.’는 말이 있다. 1630년 1월 27일 승정원일기에 인조왕은 “내가 들으니, 황희(黃喜)가 하루는 취해서 누워 있는데 비가 내려서 천정에서 물이 새니 우산을 펴 비를 피하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우산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하였다는데 청간(淸簡)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하니, 김기종이 아뢰기를, “이 이야기는 여염 간에 성행하는 미담인데,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니 어찌 선(善)을 매우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황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태종 11년 1월 13일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黃喜) 등이 말하기를, “법(法)이란 만세(萬世)의 공공지기(公共之器)이니, 일시적 방법으로 가볍게 고칠 수 없습니다.” 하여 법을 고치는데 있어서도 당대의 이익과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떤가? 당리당략으로 법을 고치니 아침에 고친 법이 저녁에 쓸모없어지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부정과 부패를 재생산하고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황희는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하여 그릇됨을 없게 하였다. 국법을 다스릴 때는 엄격하였으나 사사로운 일에는 너그러운 마음을 잃지 않았다. 관리들이 술을 먹고 관청에 출근하지 않는 일을 두고 관청에 출근하지 않은 관리를 파면시키는 궐사파직(闕仕罷職)의 법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또한 관청 및 개인의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 하는 법을 만들 때 황희는 “하늘이 백성을 낼 때에는 본래 천구(賤口)가 없었다.” 는 명분을 들어 백성들에게 공평함을 잃지 않았다.

 

한상덕이 내금위(內禁衛) 군사(軍士)의 기강이 허술함을 들어 휴가를 금지하여야 함을 태종에게 아뢰었으나 황희는 이에 반대하여 휴가를 폐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하급관리의 복지에도 신경을 쓰는 세심함을 지니기도 하였다. 하루는 집의 여종이 다투고 싸워, 서로가 황 정승에게 일러바쳤다. 그때 황희는 양쪽의 말을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이 황희의 대답이 옳지 않다고 나무라자 “부인 말 또한 옳다.” 하여 싸움을 말린 일은 유명하다. 당시 사대부들이 노비를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을 헤아려 볼 때 황희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러한 황희를 태종은 “한집안으로 대접해 왔다.” 고 하여 신뢰하였다. 이렇듯 긍정의 생각으로 90을 살다간 황희는 파주 서쪽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짓고 갈매기를 벗하며 노년을 보냈다.

 

 

방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우산으로 받으며 그는 무얼 생각하였을까? 비도 피하지 못하는 민초들의 어려운 삶과 정승인 자신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종도 다 같은 임금의 백성이라며 자유로운 생각을 막지 않았던 소통의 일인자. 소신과 원칙을 지키며 살았지만 늘 너그러움과 배려를 잃지 않았던 명재상 황희를 신숙주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은 용모가 뛰어나고 준수하였으며 타고난 품성이 관대하고 부드러운 데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이것은 늙도록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부모를 섬기기를 항상 효로써 하였고 아래 사람을 정성스럽게 마음으로 대하였다. 집안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하게 지냈으나 친척 가운데 가난하고 홀로 외로이 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도움을 주었다. 평생에 옛적의 감정을 품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원만함을 위주로 하여 남과 거스름이 없었으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옳고 그름을 면전(面前)에서 따졌으며, 일찍이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빌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우리 왕조의 어진 재상을 말할 때는 일찍이 공을 가장 으뜸으로 평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극찬하였다.

 

어찌 장마라 하여 지치고 짜증만 나겠는가? 장유는 비 온 뒤의 상쾌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골짜기에 비 한바탕 쏟고 지나 가더니峽中雲雨地(협중운우지)

그 맑은 경치 또한 기막히는 아름다움晴景亦佳哉(청경역가재)

풀과 나무들 그윽한 향기를 뿜어 내고草樹幽香發(초수유향발)

강산은 온통 푸른 빛 짙게 일렁이누나江山濃翠開(강산농취개)

 

물과 같이 자신을 세상에 맞추어 살았으나 결코 물의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명재상 청백리 황희를 비 오는 날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권중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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