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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서 칼럼니스트

기다림의 미학, 국화주

옥 같은 이슬은 영롱하여 가을빛은 서늘한데(玉露團團秋色凉)

가을바람이 몇몇 가지에 노란 꽃을 터트렸네(金風折盡數條黃)

떨어진 꽃부리는 벌써 영균의 찬에 들어갔고(落英曾入靈均餐)

한 움큼 잡은 것 이미 팽택의 술잔에 떠 있네(盈把已浮彭澤觴)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이 시는 도연명의 국화사랑과 연관시켜 읊은 것으로 찬 서리에 굽히지 않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가을 국화에 숨어사는 자신을 투영하였다. 가을 국화는 차가운 서리 발에도 견디며 시들어도 끝까지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서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일컫는다. ‘기다림’, 이는 생각만 해도 다가올 미래에 희망의 메시지가 아닌가. 현재의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며 환희와 기쁨을 그리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아니던가. 봄꽃들이 북풍한설(北風寒雪)을 견디며 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앞 다퉈 피는 장관을 연출한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봄을 모른 척하다가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피는 국화는 그 누구를 기다리는가?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국화를 기다림 그 자체로 표현했다. 소쩍새가 울며 기다렸고, 또 그렇게 천둥이 기다렸고, 끝 모를 그리움으로 잠도 아니 자고 국화가 꽃 피기를 기다렸다. 서정주는 자신의 『시 창작법』에서 “이것은 마치 내게 있어서는 오랫동안 어느 구석에 잊어버렸다가 앞서 찾아내어 쓰게 되는 낯익은 내 옛날의 소지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감개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렇듯 기다림의 미학은 국화주로 새롭게 변신하여 국화주 고유의 맛과 향을 재현하는 데 성공해 도연명의 잠을 깨우고 두보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오랫동안 잊어버렸다가 문득 옛 님이 그리워 다시 찾는 국화주는 기다리는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벗이 될 것이다.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옛날부터 ‘남방의 술과 북방의 떡’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곳에서 빚은 술은 색과 맛이 다 뛰어나며, 한 잔이면 술기운이 돌고, 술이 깬 뒤에도 갈증이 없으니 전국의 명주라 할 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방의 술’ 전통을 지켜온 국화주는 산 좋고 물 맑은 우리 땅 지천에 깔린 야생 국화를 아들로, 누룩을 아버지로, 찹쌀을 어머니로 구기자와 생지황 등 한약재를 친척들로 술독 안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술 익는 마을의 모습과 같다. 작은 초가집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돕고 살아가는 가족처럼 전통 명주로 국화주의 탄생 또한 술독 안에서 기다리는 술의 미학이다. 술이 익어가는 기다림은 국화 향기를 내뿜고, 단맛을 즐기며, 취함으로써 인생을 노래한다. 맑고 약간 붉은색을 띠는 국화주는 부드러우면서도 혀끝에 감기는 감칠맛이 일품으로 국화 향이 그 맛을 더해준다. 박목월은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 하였다. 옛 우리의 풍습은 집집마다 술을 담가서 오는 손님 가는 손님 마다하지 않고 권하여, 시름을 달래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술 문화가 있었다. 술 담그는 방법도 각각 달리하여 고유한 맛과 향을 나름대로 뽐내 취기(醉氣)를 더하기도 했다.

 

 

 

 

 

 

 

 

 

 

 

 

 

 

 

 

 

 

  

『산림경제』 ‘치선(治膳)’에 나오는 밑술 만드는 법(作酒腐本法)은 “멥쌀 1말을 깨끗이 씻어 겨울에

는 10일, 봄가을에는 5일, 여름에는 3일 동안 물에 담가, 쌀알을 속속들이 불려 건져서 푹 찐다. 여기에 약간의 누룩을 넣고 손으로 비벼 골고루 섞어 항아리에 넣고 주둥이를 봉하여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여름에는 서늘한 곳에 두어 삭아서 술이 되거든 떠 쓴다. 가을 이슬이 흠씬 내릴 때, 넓은 그릇에 이슬을 받아 빚은 술을 추로백(秋露白)이라 하니 그 맛이 가장 향긋하고 콕 쏜다. 국화꽃 향기를 술에 들이는 방법은 감국(甘菊)이 흐드러지게 필 때 따서 볕에 말려, 술 1말을 독에 담고 감국 2냥을 생명주 주머니에 담아 손가락 하나 너비쯤 떨어지게 술 위에 매달아두고 독 주둥이를 꼭꼭 봉한 뒤, 하룻밤 지나 꽃 주머니를 떼어내면 마치 섣달 매화와 같이 국화 향기가 술에 밴다.” 하였다.

 

국화는 대기만성(大器晩成) 군자의 덕과 오상고절(傲霜孤節)로 지사의 기개를 갖춘 기품과 절개의 표상으로, 장수와 번영의 선약(仙藥)으로,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꽃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석주 권필은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을 바라보며 국화주가 먹고 싶지만 찾아오는 이 없는 가을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성 밖에 거주하는 가을의 흥취〔郊居秋興〕

두어 서까래 띠 집에 책이 놓인 책상 하나(數椽茆屋一床書)

먹고 살기 쓸쓸해도 넉넉하길 원치 않으매(生理蕭然不願餘)

세간에는 영예와 치욕한 일 무한히 많건만(無限世間榮辱事)

홀로 가을 물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보네(獨臨秋水看游魚)

 

연잎은 시들었고 버들잎도 누렇게 물들어(荷葉彫殘柳葉黃)

성 밖의 물색은 벌써 중양에 가까워졌으나(郊居物色近重陽)

술 보내 가을 흥취 더해줄 사람이 없으니(無人送酒添秋興)

코를 찌르는 이 국화꽃 향기 어이할거나(奈此寒花擁鼻香)

 

성여완은 국화를 찬양하기를 “일심어 느직 피니 군자의 덕(德)이로다. 풍상에 아니 지니 군자의 절(節)이로다. 세상에 도연명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하여 국화를 보고 도연명을 그리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창밖에 국화 심어 국화 밑에 술을 빚어 술 익자 국화 피고 벗님 오자 달 돋는다. 아이야 거문고 청 쳐라 밤새도록 마시리”하여 아예 국화주 술독에 들어앉기도 했다.

 

국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예부터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높은 산에 올라가 산수유 열매를 따서 붉은색 주머니에 담은 뒤, 국화주를 마시거나 국화전을 부쳐 먹거나 국화만두를 만들어 먹으면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세시 풍습이 전해져 내려왔다. 중국 남조(南朝)의 오균이 쓴 『속제해기(續齊諧記)』 ‘중양등고(重陽登高)’에 보면 후한(後漢) 때 여남 환경(桓景)이 선인(仙人) 비장방(費長房)에게 가서 유학을 했는데, 하루는 비장방이 환경에게 이르길 “9월 9일 너의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이니 급히 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붉은 주머니에 수유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면 이 재앙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환경이 그의 말에 따라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해가 저물녘에 내려와 보니 집 안의 소, 양, 개, 닭 등 가축만 죽고 사람은 무사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가정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국화주라고 인식해 더욱 애용하게 되었다.

 

 

황호의 『동사록』에는 “『풍토기(風土記)』에 따르면 ‘9월 9일은 양수(陽數)이어서 일월(日月)이 아울러 응하니 민간 풍속이 그 이름을 사랑하여 장구(長久)하기에 마땅히 여기므로 이날에 성대히 잔치를 연다.’ 하여 민간에서는 예문에 따라서 선조의 사당에 잔을 올리며 높은 데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것이 옛일과 같이한다.”라고 나와 있으며, 9월 9일 사당에 올리는 제사에 떡은 인절미를 올리고, 술은 국화주를 올린다고 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 이곡은 ‘중구일(重九日)’이라는 시에서 “오늘은 중구일 국화주 마시는 날 고당에 계시는 백발 부모 그리워라. 바깥을 떠도는 몸 괜히 서글퍼져 시시한 벼슬에 마냥 끌려 다니기만 하네.” 하여 가족과 함께 국화주를 마시지 못하는 불효의 마음을 읊기도 했다. 또 이식은 『택당선생집』에서 “중양절에 온 가족이 우산(牛山)에 놀러 갔는데 조자실도 모친을 모시고 이곳에 왔다.”고 해 중양절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하는 풍습이 있음을 볼 때 부모님께 효도하는 날이 바로 국화주를 먹는 중양절임을 알 수 있다. 서거정의 『사가시집』에 “9월 8일에는 항아리의 좋은 술은 지금 응당 익었을 게고 울타리 밑의 국화는 이미 반쯤 피었는지라 중양일이 바로 내일임을 화급히 알리노니 어느 높은 데 올라 취하여 부축해 돌아올꼬” 하였다. 벗들에게 국화주가 항아리 가득하니 함께 취해보자며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이렇듯 조상들이 사랑한 국화주는 가을을 상징하는 최고의 술로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국화주는 두통을 낫게 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하며, 이뇨 작용을 도와주고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해주는 약주(藥酒)이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했으니 지는 가을 국화 향기 맡으며 국화주 한잔을 들고 벗님을 기다려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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