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가뭄은 오히려 견딜 만하지三月旱猶可(삼월한유가) 사흘만 비 내려도 감당키 어려운데三日雨難堪(삼일우난감) 더구나 열흘 넘게 쏟아지는 장맛비況復更彌旬(황복갱미순) 벽장 속에까지 푸른 이끼 생기겠네綠蘚生壁龕(녹선생벽감)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년∼1638년)의 장마[苦雨]라는 시이다. 얼마나 눅눅하고 힘들었으며 석 달 가뭄이 오리려 견딜 만하다 하였을까? 누구라도 여름철 장마는 견디기 어렵다. 6월의 끝자락부터 시작하는 장마는 7월 하순까지 전선(前線)을 형성하여 한반도 남북을 오가며 무차별로 쏟아진다. 산천을 초토화시키는 집중호우는 폭격을 맞은 듯 꼭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 또한 지구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인간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일 것이다. 특히 “올해 장마는 일찍 시작하고 여름은 덥고 길다.”고 하였으니 서민들의 걱정은 늘어만 간다. 무더위에 장마로 불쾌지수가 높아만 가는데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돌려주는 것을 깜빡하였느니 등등’ 터무니없는 말장난은 기가 찰 노릇으로 더욱 짜증을 가중시킨다. 전력 소비의 급증으로 대량 정전 사태가 우려되는 가운데 서민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고사하고 냉장고 속 시원한 물이라도 제대로 마실 수 있을지 걱정이
예나 지금이나 눈앞에 보이는 꽃길과 희끗희끗 야산을 물들이는 꽃핀 풍광은 아름답다. 벚꽃 터널 길을 걷노라면 내가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꽃구름 길이 내 마음을 걷고 있는지 휘날리는 꽃잎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신선도 옥 베개를 떨쳐버리고 벚꽃 구경 나온 화개장터와 쌍계사는 호리병 속 별천지 같은 무아지경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고운 최치원은 ‘화개동(花開洞)’이란 시를 지어 별천지임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동쪽나라의 화개동 골짜기에는(東國花開洞) 호리병 속 별 천지가 있다기에(壺中別有天) 신선이 옥 베개를 밀쳐둔 채로(仙人堆玉枕) 몸과 세상 어느덧 천년이 갔네(身世倏千年) 봄이 오면 꽃은 땅에 가득하고(春來花滿地) 가을 가니 낙엽 하늘을 나르네(秋去葉飛天)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 있어(至道離文字) 본래 눈앞에 보이는 것이 라네(元來在目前) 아무리 아름다운 봄날이 찾아와도 늘 어려움이 존재하는 곳이 사바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래저래 주변의 도움을 청할 때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청을 들어줄 때도 있게 마련이다. 삼계(三界) 속에 불난 집인 이 사바는 항상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요즘 유행하는 덕담에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있다. 누군들 편히 살고
남녘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은 엉덩이를 붙여둘 수 없을 만큼 떠나고 싶다. 아무리 살을 애는 매서운 겨울이라도 한때일 뿐 어김없이 봄은 찾아 든다. 새싹이 움을 트고 잎은 푸른빛으로 고개를 내민다. 자연의 변함없는 질서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면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매화를 두고 “굳센 의지와 지조가 있는 마음이 어찌 철로 된 간장이고 돌로 된 창자〔鉄肝而石膓〕일 뿐이겠는가.” 하였으며, 눈 속에 핀 설중매(雪中梅)를 더욱 어여삐 여겼다. 유몽인(柳夢寅)은 「해변(解辨)」에서 나를 묶은 자 누구인가? 란 물음에 “스스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일 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特不肯解 非不得解)”고 하였다. 그렇다. 만약 매화가 추위의 기세에 눌려 꽃을 피우려 하지 않는다면 이미 매화는 봄을 알리는 첫 꽃으로 사랑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람들도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스스로 묶인다면 개인이나 집단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굴레를 벗어던짐으로써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다. 『연감류함(淵鑑類函)』 권6 천부(天部) 풍(風)조
우리나라 사람 중에 용(龍)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본 사람도 없다. 그러나 우리 꿈속에서는 많은 용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한다. 그래서 설날의 용꿈은 꿈 중의 최고로 한해의 소원을 모두 다 이룰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사람들이 섣달 그믐날 용꿈을 꾸라는 덕담으로 새로 시작될 한해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특히 올해는 청룡의 해라고 떠들썩하다. 단기(檀紀) 4357년, 갑진년(甲辰年)은 청룡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해라고 한다. 청룡은 동방에 위치하여 머리가 되고, 시초가 되고, 즐거운 일이 되고, 봄의 생명이 되어 길한 경사로움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지게 한다고 믿어왔다. 서양에서는 용을 뱀과 같이 물리쳐야 할 악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동양에서는 신비한 능력과 무궁무진한 조화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상상의 동물로 일찍부터 우리 민족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세기 초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황룡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 천제지자(天帝之子) 즉 하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어 일찍부터 용과 함께하여온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유언을 남겨 신라
흔히들 아는 이야기지만 옛말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란 말이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호랑이가 많았다. “조선 사람은 일 년의 반은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고, 또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호랑이가 오건말건 울며 때를 써서 먹고 싶은 곶감을 먹고 호랑이도 물리쳤으니 일석이조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감은 겨울철 감기 예방에 최고의 약이였다. 약이 귀했던 시절 곶감은 비타민이 풍부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감기를 물리치는 존재였다. 감에 들어있는 카로티노이드는 비타민 A로 전환되고, 비타민 C 역할을 하는 아스코르브산은 감귤의 약 2배 정도 된다니 겨우내 두고두고 먹는 종합 비티민이 되었던 셈이다. 요즘처럼 제철 과일이 철모르는 과일에게 자리를 빼앗긴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눈 내리는 겨울 밤 곶감 한 입 베어 물고 그 달콤함을 생각해보면 문지방 밑에서 곶감 이야기를 듣던 호랑이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감은 익은 상태와 가공방법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진다. 익은 상태에 따라 감을 빨리 먹기 위해 익지 않은 땡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뺀 침시(沈柿), 잘 익어 먹기에 딱 좋은 연
옥 같은 이슬은 영롱하여 가을빛은 서늘한데(玉露團團秋色凉) 가을바람이 몇몇 가지에 노란 꽃을 터트렸네(金風折盡數條黃) 떨어진 꽃부리는 벌써 영균의 찬에 들어갔고(落英曾入靈均餐) 한 움큼 잡은 것 이미 팽택의 술잔에 떠 있네(盈把已浮彭澤觴)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이 시는 도연명의 국화사랑과 연관시켜 읊은 것으로 찬 서리에 굽히지 않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가을 국화에 숨어사는 자신을 투영하였다. 가을 국화는 차가운 서리 발에도 견디며 시들어도 끝까지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서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일컫는다. ‘기다림’, 이는 생각만 해도 다가올 미래에 희망의 메시지가 아닌가. 현재의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며 환희와 기쁨을 그리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아니던가. 봄꽃들이 북풍한설(北風寒雪)을 견디며 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앞 다퉈 피는 장관을 연출한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봄을 모른 척하다가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피는 국화는 그 누구를 기다리는가?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국화를 기다림 그 자체로 표현했다. 소쩍새가 울며 기다렸고, 또 그렇게 천둥이 기다렸고, 끝 모를 그리움으로 잠도 아니
안성은 편안하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맞춤 그대로 소통하게 한다. 먼저 고객의 손과 발에 맞추어 불편함이 없게 하고 그다음 눈에 들게 하여 기분을 맞추고, 마음에 들게 하여 행복을 맞추어 준다. 손과 발이 유별나게 열정적인 안성사람들은 안성맞춤의 원조인 안성유기를 만들었고, 쌀농사를 잘 지어 전국 최고의 밥맛을 자랑하고 그 쌀로 술을 담그니 최고의 막걸리가 나왔다. 요즈음 안성은 바우덕이의 줄타기로 관광객의 마음을 맞추고, 안성의 유기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안성의 막걸리와 쌀밥은 팔도사람의 입맛을 맞춘다. 옛날 안성은 지형적으로 삼남(三南)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으로 4세기 이전에는 백제지역, 5세기에는 고구려 영토가 되었으며, 6세기에 신라가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는 등 삼국, 후삼국의 모퉁이에서 전쟁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또 안성 주변은 산이 깊어 수많은 도적들의 은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도적들이 칠장사 샘물을 마실 때는 분명 금 바가지였지만 소굴로 가져가면 박 바가지였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찮은 바가지에도 탐욕이 앞서니 도적의 욕심을 불심으로 바꾼 혜소국사의 신통력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으로 지루한 장마도, 뜨거운 불볕도 한풀 꺾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잊고 지낸 어린 날의 동요인양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고향의 부모님은 잘 지내시는지? 빌딩사이로 초라하게 내민 둥근달은 자식에게 폐를 끼칠까 봐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 같아 쳐다보기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군다. 어머니는 자식이 잘되길 저 달님에게 얼마나 빌고 비셨을까? 달은 우리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고, 쉬어가게 하는 어머니 같다. 태양이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엄한 아버지를 상징한다면, 달은 보수적이고 과거지향적인 자애로운 어머니의 성품을 지녔다. 불가(佛家)에서는 달을 “달빛은 두루 중생에게 비추어 재앙을 쉬게 하는 보살(月光遍照 息災菩薩)”이라하였다. 이렇듯 달은 자식들을 감싸주고 편히 쉬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에 보면 추석이 시작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경주의 6부(部)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고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다가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이르러 헤어지곤 하였
창호지 하나로 세상을 가리지만 방안 가득 햇살을 머물게 하고 보름달과 함께 한 이불 덮고 옛정을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창호이다. 호랑이가 곶감 이야기를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 빠지게 도망가게 한 곳이 초가집 창호 밑이다. 한국의 집에 설치된 창호는 창(窓)과 호(戶)로 구분된다. 엄밀히 따진다면 창은 햇빛과 바람을 방안에 들이기 위한 구조물이고, 호는 사람이 방에 출입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이지만 창호라는 이름으로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되나 서양의 경우에는 ‘door'와 ’window'는 완전히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한국의 창호는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단순히 방안 출입의 기능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창호에는 한국인의 염원을 표출하고 있다. 그래서 창호의 이름도 다양하다. 먼저 그 기능적인 면으로 창호를 분류하면 여닫이, 마당이, 들어열개 등으로 다양하다. 여닫이는 문틀에 돌쩌귀를 박아 창호를 바깥쪽으로 당겨서 열개하는 밖 여닫이가 대부분이다. 이 여닫이 안쪽에는 이중의 창호를 설치하여 추위와 비바람을 막게 하는 미닫이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미닫이는 문틀을 짤 때 가로로 아래
속담에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있다. 무더위로 인한 힘든 마음을 여름 모기에 빗대어 더위도 한풀 꺾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건강하게 지내고자 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불러 힘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만 생각하여 집 안의 모든 창문을 꼭꼭 닫아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냉방기를 가동하여 시원함을 느끼나 이것은 이내 감기에 걸리기 쉬운 여름나기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 옛 조상들의 여름 나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멋짐이 있었다. 시원함을 즐기기 위해서 우선 서늘한 그늘을 찾아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자리를 깔았다. 집 안에서는 모든 창문을 열어젖혀 사방을 트이게 해 자연의 바람이 통과하길 기다렸다. 그래도 바람이 들어오지 않으면 커다란 부채를 설렁설렁 흔들어 여유롭게 땀을 식히며 바람이 들어오길 기다리곤 했다. 옛날 말에 "가을에 추수하여 곡식 팔아 첩을 사서 동짓날 긴긴밤을 첩과 함께 지냈건만, 오뉴월이 돌아오니 첩을 팔아 부채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죽하면 오뉴월 삼복더위에 가족을 팔까? 추위는 견딜 수 있다지만 더위는 견디기 힘들다는 역설적인 노래로 부채의 소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