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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서 칼럼니스트

필 때보다 질 때가 더욱 그리운 벚꽃

예나 지금이나 눈앞에 보이는 꽃길과 희끗희끗 야산을 물들이는 꽃핀 풍광은 아름답다. 벚꽃 터널 길을 걷노라면 내가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꽃구름 길이 내 마음을 걷고 있는지 휘날리는 꽃잎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신선도 옥 베개를 떨쳐버리고 벚꽃 구경 나온 화개장터와 쌍계사는 호리병 속 별천지 같은 무아지경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고운 최치원은 ‘화개동(花開洞)’이란 시를 지어 별천지임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동쪽나라의 화개동 골짜기에는(東國花開洞)  호리병 속 별 천지가 있다기에(壺中別有天) 

신선이 옥 베개를 밀쳐둔 채로(仙人堆玉枕)  몸과 세상 어느덧 천년이 갔네(身世倏千年)

봄이 오면 꽃은 땅에 가득하고(春來花滿地)  가을 가니 낙엽 하늘을 나르네(秋去葉飛天)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 있어(至道離文字)  본래 눈앞에 보이는 것이 라네(元來在目前)

 

아무리 아름다운 봄날이 찾아와도 늘 어려움이 존재하는 곳이 사바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래저래 주변의 도움을 청할 때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청을 들어줄 때도 있게 마련이다. 삼계(三界) 속에 불난 집인 이 사바는 항상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요즘 유행하는 덕담에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있다. 누군들 편히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참고 견디며 살아가기에 ‘사바세계’라 한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 때는 눈앞에 보이는 호리병 속 별천지 같은 화개장터와 쌍계사로 떠나보면 어떨까?

 

봄이면 우리나라는 벚꽃 천국이 된다. 한때 일본이 미워서 길거리의 우리 토종 왕벚나무를 ‘사쿠라’라 하여 마구 베어버린 적도 있지만 벚나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시 관상용으로 심기 시작하여 이제는 봄꽃의 제왕 자리를 누리고 있다. 벚나무는 세계 여러 나라에 4백여 종이 있고, 우리나라 고유의 수종으로 왕벚, 산벚, 올벚 등 6종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왕성한 생장력을 보이며 연분홍 꽃이 나무 전체를 덮는 화려함은 한국인의 끈기와 희망을 잘 나타낸 듯하다.

 

 

특히 국란을 불력(佛力)으로 막고자 하였던 고려인들은 국보 제32호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산벚나무에 판각(板刻)하였는데 16년이란 기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대장경판은 81,258장으로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 내외, 세로 24㎝ 내외이고 두께는 2.6㎝~4㎝이다. 무게는 3㎏~4㎏ 내외이다. 경판은 뒤틀림이 없고 수천만 개의 글자를 새김에 있어 오·탈자가 없으며,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불가사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인해 세계적인 문화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벚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기이2」‘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에 충담사는 벚나무로 만든 앵통(櫻筒) 속에 다구(茶具)를 넣고 다녔으며 경덕왕에게 차를 끓여 바쳤다고 한다.

 

이처럼 분명 벚나무는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원산지임을 알 수 있다. 일본사람들이 벚꽃을 좋아하여 왕벚나무를 일본 자생지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요시노 산의 왕벚나무가 벚꽃의 명소로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 나라의 땅은 백제 성왕이 불교를 전파한 곳으로 한국의 문화가 유입된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한국 왕벚나무도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1908년에 프랑스 신부 에릴과 타퀘는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부근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하여 독일 식물학자 퀘흐네 교수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또 1912년 독일 식물학자 퀘오네 교수가 제주도에서 왕벚나무를 확인하고 학명을 "Prunusyedoenisis"라 하여 유럽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또 일본의 식물학자 고이즈미 겐이치는 1933년에 소메이 요시노사쿠라(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닌 제주도 한라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또 워싱턴의 명물이 된 한국 벚꽃은 1912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일본이 3천 그루를 기증하여 심었으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분노한 미국 국회가 베어 버리도록 결의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벚꽃은 일본 꽃이 아니라 한국 제주도가 원산지인 한국의 꽃이라 역설하여 다행히 살아남아 지금도 벚꽃이 필 무렵이면 워싱턴은 한국 벚꽃으로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외국에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는 제주도 봉개동 왕벚나무는 1964년에 천연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귀한 몸이 되었다.

 

지금도 봄이 오면 쌍계사는 호리병 속 별천지를 펼쳐 보인다. 꽃이든, 사람이든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벚꽃이 떨어지면 ‘이젠 봄도 가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조선 중기 문인 석천 임억령은 친구 자방 이란에게 지어준 ‘시자방(示子芳)’ 시에서 지는 봄을 아쉬워하였다.

 

옛 절 문 앞에서 또 봄을 떠나보내려니(古寺門前又送春)

남은 꽃잎 비를 따라 옷에 점점 찍히네(殘花隨雨點衣頻)

돌아올 제 소매 가득 꽃향기 남아 있어(歸來滿袖淸香在)

무수한 산 벌들이 먼 길 까지 따라오네(無數山蜂遠趁人)

 

비바람에 떨어지는 화개동 십리 벚꽃이 도포 자락에 달라붙어 점점이 아롱진다. 산벌도 지는 봄이 아쉬운 듯 소매 가득한 봄 향기 따라 십리 벚꽃길을 나선다. 옛 절문에 기대서서 봄이 가듯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낙화에 비유하여 나타내었다. 화개동 벚꽃과 함께 쌍계사 절 문에 기대어 서서 이 시를 읊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문득 옛 유행가가 귓전을 맴돈다. 손로원의 시에 박시춘이 곡을 붙이고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봄날 이별의 정한을 느끼게 하는 벚꽃이 이리도 빨리 떨어지는지 야속하다. 어느 봄날 잠깐 들른 낭군님처럼 회포도 풀 겨를도 없이, 한 잔 술에 취하기도 전에 바람에 흩날려 버린다. 떨어지는 꽃잎을 어이 막으랴? 떨어지는 꽃잎은 나무에 걸어두었던 사랑의 징표인가?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떨어지니 님이 그립고 가는 청춘이 아쉽다. 꽃구름 호리병 속 별천지! 이심전심의 무아지경! 화개동 봄날엔 벚꽃이 핀다. 벚꽃이 진다. 뉘 사랑의 이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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