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동아시아 문명권의 특징을 대표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 대한 최종심으로 여겨진다. 전통 시대의 역사는 통치자의 말[言]과 일[事]을 기록하면서 속뜻을 밝히고 시대를 평가해 왔. 서구 문명권에서 역사(historia)는 사건의 기술이자 이야기일 뿐이며 그에 대한 최종적 가치 판단은 종교의 영역이었다. 이야기가 소설로 발달하면서 동아시아는 역사를 가장하지만 유럽은 고백록을 연원으로 삼는다. 동아시아인은 신의 이름을 걸기보다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범의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은 어떤 속뜻을 지닌 것인가? 다음 서문은 ‘역사’의 내력과 의미를 곡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사(史)’란 왕의 관리로서 그 말과 일의 찬술을 맡는 직책이다. 세상에 대단한 변론과 지식을 지닌 선비들은 제 능력을 자부하지만 사관의 붓대를 얻어 시대의 전범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반드시 마음이 근질거려 덮어둘 수가 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만물의 실상을 캐고 소설 더미를 들춰내어 글을 만들면서 ‘사(史)’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다. 그러한 경우 반드시 사관의 직책이 아닐지라도 누구나 역사를 집필할 수 있고, 제왕의 일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물이든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역사의 길이 넓어진다.
무릇 범에게 역사가 있음은 옛부터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 ‘송파(松坡) 이선생(李先生)[1]’이 집필한 것이다. 선생은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록물이나 사상과 역사, 문학물 가운데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범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모두 모아 거둬들였다. 그래도 미진하다 싶으면 다시 우리나라 범 이야기 가운데 채록할 만한 것을 취하여 기록했다. 대개 이야기꾼의 전기(傳奇)와 화전민의 실제 사건인 경우가 많고 간간히 또 논평을 표시해 두기도 했다. 정사(正史)의 예를 준칙으로 삼되 비슷한 것을 끌어다 사물을 비유하니 글의 취지가 분명하고 상황이 절실하여 뒤숭숭한 세상에 일침을 놓을 만한 게 있다. 또 때로 잡스럽고 근거없는 것도 실었으니 선생이 일부러 골계로 삼은 것이다. 굳이 정론으로 평가하자면 바보가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아아! 선생의 불세출의 문장은 일찍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빛을 발했으니, 나중에 국가 문헌을 다룰 시절에 금궤 석실에 간직할 장서와 변치 않을 법전을 편찬하는 일[2]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다만 늘그막 벼슬길에서 엎어져 변방으로 쫓겨나서[3], 그의 글쓰는 일이 한갓 패사 소설처럼 된 것이니 불우한 시대인지라 그랬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반고(班固)의 옥사 이야기[4]가 지금까지도 쓸쓸하게 전해지겠는가?
그렇지만 이 책을 지음에는 나름의 뜻이 있다. 지금 모든 존재가 저마다 수만 가지로 다르게 내는 저 피리소리들이[5] 분분하면서도 특이하고 괴벽스러워 천지간에 가득차고 눈귓가에 와서 부딪힌다. 그 가운데 기이하고 뛰어난 것들을 수집하고 찾아냄은 모조리 역사가들의 훌륭한 자료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저술 논변이 먹이감 찾는 ‘패려한 짐승[戾蟲]’[6]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과연 어찌 해석할 것인가?
예전에 초나라 역사를 ‘도올(檮杌)’이라 불렀으니, ‘도올’이란 악한 짐승이라는 뜻이다. 어쩌자고 책을 지으면서 악한 짐승으로 이름한 것인가? 이러한 의의를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다. 무릇 선을 행하는 자는 본성을 따르므로 누구의 권유를 기다리지 않고도 일어선다. 악을 행하는 자는 본성을 거슬리므로 두려운 때가 되어야 정신을 차린다. 그러므로 악함을 거론하고 선함을 거론치 않음은 장차 그 엄중함을 가져다가 두렵게 만들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 초나라 사람들의 속마음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도 혹 ‘도올’의 뜻이 있는가 보다. 그렇지 않다면 책에 어찌 기린(麒麟)과 추우(騶虞)[7]는 없으면서 오도(於菟)[8]의 역사를 기필했겠는가? 선생이 머릿말을 쓰라고 명하시니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오상렴(吳尙濂, 1680~1707), 〈호사서(虎史敍)〉, 《연초재집(燕超齋集)》 권5
오상렴은 스승 이서우(李瑞雨)가 《호사》를 편찬 저술한 데 대해서 우선 ‘역사’ 자체를 문제 삼았다. 동아시아 중세 국가는 사관을 두어 통치자의 언행을 기록하고, 통치자 사후에 그 모든 기록을 정리 종합하여 평가했다. 《왕조실록》이 그렇게 탄생했다. 조선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도 가장 촘촘하게 실록 문화를 실천한 국가였다. 또 왕조가 바뀌면 승조(勝朝)에 대한 역사를 편찬하여 귀감으로 삼았다. ‘승조’는 무력을 통해서든 아니든 간에 새 왕조가 전 왕조보다 더 수승하다는 의식을 반영하는 어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기울여 승조의 역사를 정연하게 찬술해 냈던 것은 우월감에 도취하기보다는 자기 나라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이전 역사는 자기를 비춰보기 위한 거울일 뿐이지 자기 과오를 오직 남의 탓하기 위한 변명 거리의 자료는 아니었다.
물론 국가 통치의 역사만 역사는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통치의 속뜻을 들여다 보기 어렵다. 변혁의 시대에는 통치자도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통치 시스템 그 자체가 역사의 대상이며 신민(臣民)일지라도 가문과 개인의 역사가 있게 마련이다. ‘개인’의 탄생을 두고 서구 근대를 떠올리기 일쑤이지만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에 열전(列傳)편이 마련된 것은 그만큼 경이로운 일이다. 그 이후로 한 개인의 자초지종을 적는다는 것, 그리고 역사의 평가를 정당하게 받는다는 것은 한시적 삶을 누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영광이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근대 국가에서는 특정 사안의 최종심을 대법원에 맡기고 있지만 과거의 영역과 미래까지 연결시키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대법원은 법률 체계 내에서의 정합성만을 문제 삼으며 판례를 쌓아감으로써 법치주의의 정당성을 목표로 두고 노력할 뿐이다.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변질되기 쉬운 법치주의와는 다르게 통치 권력에 대한 제어를 지향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로서 보장되는 헌법적 권리나 자연법이 헌법재판소 같은 기관의 심판에서 과연 얼마나 구현되는지도 의문이다. 개인의 억울함이 있더라도 혹은 구조적 불합리가 용인되더라도 우리는 어차피 법의 약속에 따라 조직된 민주주의 체제에 맞추어 현대를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사의 최종심급은 언제, 어디에서인가? 오늘날에도 역사가 그런 기능을 담당하고 있을까? “관뚜껑 덮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 “착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라는 되뇌임은 혹시 ‘정신승리법’이 아닐까? 하지만 오상렴이 설파했듯이 “역사의 길은 넓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근질거림’을 눌러두지 말고, 사람과 사물의 속살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한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명을 얻어 자연계를 이용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문명을 일궜다. 동아시아 최상위 포식자 ‘범’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앗아갔던 가장 오래된 짐승이다. 범의 서식지와 사람의 거주지 사이에 분명한 구획이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가 정확히 인간 문명의 치세와 난세와 겹친다. 인간들끼리의 싸움인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는 유독 천재지변이 잦고 호환도 자심했다. 태평성대는 다름 아닌 그러한 여러 종류의 재앙이 제어될 수 있었던 시대를 일컫는다.
후한 초 명문가 출신이었던 반고는 부친 표(彪)의 《한서(漢書)》 저술을 계승하여 20년간 이 일에 종사했다. 그러나 후한 장제(章帝)의 두황후(竇皇后)의 오빠인 두헌(竇憲)의 역모에 연루되어 미완의 《한서》 저작을 남겨두고 옥사했다. 그의 누이동생 소(昭)가 나머지를 완성해야만 했다. 통치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역사가의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대의 치란이 역사 집필의 순역(順逆)을 결정함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도한 시대에 정직한 역사, 올곧은 언론을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범을 다르게 일컫는 어휘는 꽤 많다. 그 가운데 대충(大蟲), 여충(戾蟲) 등은 포악한 짐승이라는 속뜻이 있다. 이에 비해 소위(素威), 수군(獸君), 산군(山君) 등은 범의 위엄과 권세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컬음이다. 우언 작품으로 <산군전>은 있어도 <여충전> 등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올》이라는 악한 짐승으로 이름 붙인 초나라 역사책이 있었다니 갸우뚱해진다. 하기야 요즘 세상같으면 《도올》의 역사가 차고도 넘친다. 미국 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과학수사대(CSI)> 수사물 종류가 한둘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용감한 형사들> 시리즈가 두터운 시청팬을 형성하고 있다. 사악하고 교활한 갖가지 인간이 같은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해꼬지하고 죽인다. <여충전>이 있을 법도 하다.
어쨌거나 대충(大蟲)은 ‘몸집 큰 식충이’라는 멸시에 가까운 별명이다. 오상렴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먹이감을 물색하고 걸려들면 잔인하게 찢어먹는 일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요즈음 말투로 일컫자면 ‘먹이충’인 셈이다. 이는 원나라 잡극 <소울지(小尉遲)> 혹은 <수호전(水滸傳)> 등에 용례가 보인다. 특히 <수호전>에서는 무술의 고수인 양지(楊志)에게 시비를 걸다가 죽음을 당한 개봉(開封)의 파락호 우이(牛二)의 별명을 ‘무몰대충(沒毛大蟲)’이라 불렀다. 이는 저자거리에서 서민들을 갈취하며 괴롭히는 악질 무뢰배의 대명사이다. “호피도 없는 먹이충”인 셈이다. 분명 약하고 빈틈 있는 자를 찾아내 못된 짓을 하다가 임자를 만난 셈이다. 그것도 왠만하면 싸움을 하지 않으려는 무림의 고수를 기어코 폭발하게 만든 아둔함 때문에...
한편 산군이니 수군이니 ‘임금’으로 별명을 붙인 것은 서기 1세기 후한의 학자였던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호부(虎部)」에서 “범은 산짐승의 임금”[虎, 山獸之君]이라는 언급에 근거한다. 명(明) 주모위(朱謀㙔)가 편찬한 《병아(駢雅)》 등에서 그를 부연됐다. 한자 부수에 ‘호虍’가 있는 것은 호랑이(tiger)를 맹수의 대표로 인정하고 서로 다른 등속의 일족과 특징을 구분지어 지칭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범’이 포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어진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뿐만 아니라 자식을 끔직히 아끼는 나름의 윤리가 있다. 산속의 제왕이 되어 산신령을 보좌할 뿐만 아니라, “범도 새끼 둔 곳을 두남둔다”고 사람들이 속담으로 전해 준다. 그래서 범처럼 무서운 부왕도 세자의 곤란한 처지를 딱하게 여겨 어진 임금의 길을 열어준다. 물론 권력에 눈이 먼 부왕은 자식을 정적으로 여기고 그 가족을 몰살해서 범에게 부끄러운 임금이 되기도 한다. 이래저래 범에게는 선악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이야기거리가 뒤따른다.
오도(於菟)는 전국시대 초나라 영윤(令尹)이었던 자문(子文)의 어릴 적 이름이다. 그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초(楚)나라 3대 명문의 하나인 투약오(鬪若敖)의 아들인 투백비(鬪伯比)는 소국 운(鄖)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이 낳았지만 출생 직후 들판에 내다버렸다. 범이 젖을 먹여 살아 있어서 다시 데려왔다. 사람들이 초나라 방언으로 아이 이름을 ‘투누오도(鬭穀於菟)’라고 불렀다. ‘투’는 투백비의 사생아를, ‘누’는 젖을, ‘오도’는 범을 뜻한다고 한다. 오도는 초 성왕의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남방의 강자로 세우고 중원의 패권을 넘볼 정도로 부흥시켰다. 초 성왕은 그를 이름 대신에 ‘자문(子文)’으로만 부르게 해서 흔히 ‘영윤 자문’으로 일컫는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태어나 버림을 받았지만 신령의 보호로 살아나 나라를 구한다는 ‘영웅의 일생’을 구현한 전형적 인물이다. ‘오도’는 ‘도올’과 다르게 버림 받은 영웅의 수호자인 셈이다.
한편 해수(害獸) 범의 대척점에 ‘기린’이나 ‘추우’ 같은 인수(仁獸)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좀체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성군현신의 만남을 상징하며 태평성대에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 신화적 동물이다. 기린은 살아 있는 풀과 벌레를 밟지도 생물을 잡아 먹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마가 없어 떠받지 않고 일각수(一角獸)이지만 뿔에 살이 있다고 한다. 《시경》 「주남(周南)」편의 <기린의 발꿈치>[麟之趾]는 바로 주 문왕의 문덕(文德)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 추우는 검은 무늬에 흰 범의 모습을 띠며 범보다 훨씬 몸집이 크고,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먹지는 않지만 범을 만나면 물어죽인다고 한다. 범의 천적으로 일컫어지는 추이(酋耳)라는 동물과 거의 비슷하다. 그처럼 해수의 대명사인 범을 퇴치하는 맹수이니 인수라 한 것이다. 《시경》 「소남(召南)」편의 마지막 작품 <추우(騶虞)>는 ‘추우’의 정체를 두고 전통적으로 여러 주석이 뒤섞여 해석이 분분한 난해한 시로 알려졌다. 추우는 왕의 수렵관이거나 어원(御苑) 관리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린’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군의 무덕(武德)을 노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해수의 대명사로 치부된 ‘범’을 위해 역사의 한 자락을 들춰보고 싶다. 태세 전환에 능숙한 일본이 서양의 근대를 조선보다 한발 앞서 받아들여 식민지 제국주의를 경영하던 시절에 조선의 한반도는 ‘해수구제(害獸驅除)’라는 명목으로 범 사냥터가 됐다. 물론 표범, 곰, 사슴 등의 야생동물도 함께 남획됐지만, 특히 <정호기(征虎記)>가 유행할 정도로 범사냥은 조선에 대한 우월감과 과시를 상징하는 일면이 있었다. 그들도 《시경》의 <추우>를 익히 학습하고 스스로 조선의 해충구제 사업자임을 자임했던 것인가? 일본의 범 이야기는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조선총독부는 이웃 나라를 조금이라도 배려할 만한 어진 ‘무덕’이 없었던 것도 또한 분명하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거나 진정을 담아 사죄하지 않고 있다.
[1] 송파(松坡) 이선생(李先生): 송파 이서우(李瑞雨, 1633~1709). 필자 오상렴은 그의 제자이다.
[2] 명나라 사신 … 편찬하는 일: 송파 이서우는 1676년(숙종2, 44세)에 인조반정의 변무사(辨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고, 1692년(숙종18, 60세)에는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지냈다.
[3] 변방으로 쫓겨났으니: 송파 이서우는 1680~1683년(숙종6~9, 48~51세)에 함경도 변방인 부녕(富寧)으로 유배갔다가 청암(靑巖)으로 이배된 적이 있다.
[4] 반고(班固)의 옥사 이야기: 《한서(漢書)》 저작자로 알려진 후한의 반고는 그를 완성시키지 못 한 채 옥사했다.
[5] 모든 존재 … 피리소리들이: 《장자·제물론》에서는 인뢰(人籟), 지뢰(地籟), 천뢰(天籟)의 비유를 들어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각자 다른 존재 활동을 벌인다면서 “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이라고 했다.
[6] 포악한 짐승[戾蟲]: 범의 이칭이다.
[7] 기린(麒麟)·추우(騶虞): 치세를 상징하는 인수(仁獸)의 대명사.
[8] 오도(於菟): 초나라에서 일컫는 ‘호(虎)’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