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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필 칼럼니스트

《신편호사(新編虎史) Ⅲ》 -21세기에 새로 엮는 범의 역사

「무는 호랑이는 뿔이 없고, 뿔 달린 짐승은 이빨이 없다」

“무는 호랑이는 뿔이 없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범이 무용을 자랑해도 권위의 상징인 뿔은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뿔 짐승은 송곳니가 없다. 초식동물이라 그렇다. 사자성어로 ‘각자무치(角者無齒)’라 한다. 《여씨춘추》에서는 몇 가지 예를 더 들었다. 열매가 많은 나무는 키가 크지 못한다. 이를 사람에게 비유한다면? 모든 것에서 지혜롭고자 하는 자는 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하늘이 이치이다. 이 책은 진시황의 진(秦) 제국의 기틀을 놓았던 여불위(呂不韋)의 주도 아래 제왕의 통치술을 위한 백과사전으로 편찬된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학자의 입장은 다르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뜻을 널리 가져서 갖가지 지혜를 추구하는 지식 전문가를 만나고, 일의 선후를 따지고 마지막으로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호사》 저작자였던 이서우(李瑞雨)의 <우언> 한 편을 음미해 본다.

 

표범이 조물주에게 여쭈었다.

“신이 사람에게 잡히는 이유는 털가죽이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털 벗긴 가죽으로는 사람이 겨울을 날 수도 없습니다. 청컨대 양과 바꿔 주십시오.”

조물주는 표범에게 “좋다”고 하고는 양을 불러서 말했다.

양이 이르기를,

“신은 고기가 맛있는 까닭에 도축을 면치 못합니다. 게다가 무늬 있는 털가죽까지 더한다면 필시 우리 무리는 남아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부득이하게 바꾸라 하신다면 범의 발톱과 이빨을 모두 얻어서 사람에게 대항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니, 표범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표범이 양이고 양이 표범인 것이다. 양으로 사느니 표범으로 죽는 것만 못한 것인데, 더구나 양이 되어서 죽으라는 것이냐?”

표범은 더 이상 말도 않고 가버렸다.

 

 물고 할퀴는 고양이과(科) 짐승은 대개 털가죽이 아름답다. 호표(虎豹)는 그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범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할 때의 ‘가죽’은 당연히 털가죽을 일컫는 것이다. 털가죽을 무두질해서 생가죽만 남는다면 《논어》에서 자공(子貢)이 언급했듯이, 호표(虎豹)의 가죽이나 견양(犬羊)의 가죽이나 똑같다. 털을 제거하고 보면 짐승 가죽이라는 게 모두 ‘개가죽’ 수준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의류업 수준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발언이지만, 2천5백년 이전의 당시 상황으로는 그럴 듯한 비유이다.

 

 <우언>에서 표범은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털가죽으로 꼽았다. 자기를 잡아죽여 무두질해서 만든 가죽 옷은 겨울 나기도 어렵다고 푸념했다. 표범이 논어 를 읽었을 리 만무하지만, 털 없는 자기 가죽은 ‘개가죽’처럼 별 볼일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별히 날렵한 사냥견이나, 궁중의 애완견들은 죽어서 식용이 되지 못하고 명예롭게 홑가죽을 남길 뿐이다. 민간에서는 기껏 농악대의 장구나 북에 쓰일 수는 있었다. 홑창처럼 얇기 때문에 소리 공명은 잘 되지만 보온 효과는 없다. 표범은 적어도 인간들의 호피 사랑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뿔 달린 양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양은 받는 뿔이 있지만 누구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다. 각축(角逐)하며 선후를 다투고 두각(頭角)을 나타내는 데 쓴다고는 하지만 살상용은 못된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정기적으로 도축되어 단백질원을 제공한다. 거기다 문채 나는 털가죽까지 두룬다면 양이라는 겨레붙이는 씨가 질 것이다. 뿔이 높아 슬픈 짐승인 양의 입장에서는 발톱과 송곳니라도 지녀야 인간의 순치에 저항할 수 있다.

 

 맹호의 무용은 조아(爪牙)에서 나온다. 범이 그것을 잃는다면 어설픈 발톱과 이빨을 지닌 개에게도 굴복해야만 한다. 한비자(韓非子)는 통치자가 권세를 지니고 신하를 부릴 수 있는 두 가지 지렛대로서 형별과 은덕을 잃으면 오히려 신하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비유로 사용했다. ‘현표무은(玄豹霧隱)’이니 ‘호피돋음’이니 하는 것은 인간적 덕목이거나 취미일 뿐이다. 표범이 발톱과 이빨을 잃고 양의 뿔을 단다면 이미 그것은 표범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양이 표범의 털을 받고 발톱과 이빨까지 얻는다면 이미 표범인 것이다. 표범의 억지스러운 거래는 취소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범이 번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호피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자연 생태계에서 상위 포식자의 개체수는 적다.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갖지는 못한다.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고, 약점은 다시 장점이 된다. 지구상에서 수만 년만에 멸종 위기종에서 최대 크기의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한 ‘호모 사피엔스’만이 예외인 듯이 군다. 다만 하늘의 이치 혹은 생태계의 원리가 그런 줄 알고 인간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 이서우의 <잡설> 한 부분을 살펴본다.

 

 꿩은 많고 솔매는 적기 때문에 꿩은 없어지지 않는다. 사슴, 노루, 토끼는 많고 범은 적기 때문에 사슴 등은 없어지지 않는다. 무릇 적거나 많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던가? 꿩이나 사슴, 노루, 토끼가 여리고 우둔하니 하느님이 가엽게 여겨 번식시키고 싶으신 걸까? 매나 범은 강하고 사나우니 하느님이 미워서 끊어버리고 싶으신 걸까? 가엽게 여기신다면 어째서 발톱 이빨을 주어 매나 범에게 대적하게끔 만들지 않는 걸까? 미워하신다면 낳아서 기르고 발톱 이빨을 주어 폭력까지 보태주는 걸까?

그렇지만 범과 범, 매와 매는 서로 잡아먹지 않는다. 하느님도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 사랑하게 만드신 것일까? 사람은 범을 죽일 수도 있지만 또 범에게 먹히기도 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은 사람 보시기를 범보다 귀히 여기지 않으시어 싸우게 만드신 것일까? 옛 사람들은 서로 살려주기를 좋아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서로 죽이기를 좋아한다. 어째서 옛 사람은 범보다 어질고 지금 사람은 범보다 포악할까? 어찌 하느님이 인성을 부여한 것이 옛날에는 모두 어질고 지금은 모두 포악할까? 사람은 만물을 먹으니 범보다 강하면서도 사나우니 하느님에게 미움을 받아 자기 무리에게 서로 잔혹하게끔 만든 것인가?

천지라는 것은 그릇이다. 만물이 번식하여 장차 가득차서 넘칠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부득이 덜어내는 것일까? 불자들이 말하기를 서천에 있는 어떤 곳은 날짐승 들짐승과 사람들이 즐기고 노닐며 서로를 해치지 않고 병들어 죽는 고통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에게 정말 사사로운 사랑이 있는 것일까?

 

 온통 회의로 가득찬 글이다. 딱히 결론이나 주장은 없지만, 상위포식자의 정점에 놓인 ‘범’과 ‘사람’이 먹고 먹히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된 까닭을 회의하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모든 생명을 낳고 기르는 하느님에게 사람이 미움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옛날 사람’은 누구이고 ‘지금 사람’은 누구인가? 고인류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라는 종(種)으로 진화했다. 그에 비해 현재의 인류는 제 삶의 터전인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사생결단의 편싸움을 벌린다. 심지어 무형의 공유 재산을 저버리고 겨레붙이 동족끼리 반목하고 사유 재산을 늘리기 위해 내전을 일삼는다.

 

 이렇게 인류라고 하는 다중 개체수를 스스로 덜어나가는 ‘인간 현상’의 근원적 원인은 무엇일까? 자기가 자기를 공격하는 고약하고 이상한 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비단 우리 몸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 지구에 너무 많이 퍼져서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스스로 분열하고 서로를 공격한다. 공생하지 못하면 공멸한다. 장점이 약점이고 약점이 장점인 것은 결국 생태계에 군림하는 인류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인간이라고 제발 잘난 척 할 일이 아니다. 호환(虎患)을 박멸하고 범을 동물원에 가두었다고 사람이 범보다 잘난 것이 아니다. “가혹한 정치가 범보다 사납다”고 한 말은 이미 공자 시대에 나왔다. 인간의 적(敵)은 인간이다. 사막에 예쁜 새들이 노래하고,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최상위 포식자의 슬픈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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