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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필 칼럼니스트

《신편호사(新編虎史) ⅵ 》 -21세기에 새로 엮는 범의 역사

- 「대만 가족여행」

   딸아이가 직장을 옮기는 틈새에 말미를 얻어 가족 여행을 급하게 계획했다. 무비자이며 한국에서 가까운 대만을 택했다. 타이페이(臺北)의 관문인 타오위엔(桃園)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풍광우일신(風光又一新)”이라고 휘갈겨 쓴 커다란 세예 작품이 공항 대청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대만 관광청에서는 국제관광진흥책으로 ‘여행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착해서 알았다. 대만달러 5,000원(한국돈 20여만 원 상당)의 전자 바우처 내지 숙박 할인쿠폰을 24시간 이전에 신청한 여행객이 공항 도착시 추첨을 통해 교부한다는 내용이다. 당첨됐다는 한국 관광객들을 여행 기간 동안에 여럿 만나고는 챙기지 못한 것이 살짝 아쉬웠다.

 

 

   그러나 대만의 일신된 면모는 의외의 장소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얼얼바(二二八) 평화 기념 공원’을 방문해서 위령탑과 화해 촉구의 기념문을 보고는 우리 제주 4.3사건과 평화공원을 아프게 떠올렸다. 그리고 공원 전면에 위치한 국립대만박물관에서는 중국이 아닌 대만의 역사와 자연사를 관람했다. 대만 원주민들의 생활 유품관을 지나자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그린 수채화 풍의 <타이욘(Taioan)>을 모사한 체험형 전자지도 시뮤레이숀이 전시되어 있었다. 성채 구역 ‘05’를 터치해 보았다. 아래와 같은 상세 그림과 설명이 나타났다.

 

 

   네널란드는 17세기 타이난(台南)의 타이 강(台江)의 내해(內海)에 조성된, 거대한 물고기 모양의 모래섬에 정주하여 성채 ‘질란디아(Zeelandia)’를 구축하고 국제무역항을 건설하여 성세를 누렸던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중요 지점을 조감하며 명칭을 일일이 붙였다. ‘타이욘’ 또는 한자 표기로 대원(大員)은 태강이 바다와 만나는 해안 지역과 모래섬 거주처를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반면에 북쪽에 위치한 본섬을 ‘포모사(Formosa)’라고 불렀지만, 오히려 ‘타이욘’이 훗날 타이완(臺灣) 전역을 지칭하는 명칭이 됐다.

   그 다음 구역에는 정성공(鄭成功)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서방인, 한족, 청조, 대만인의 눈으로 묘사한 그의 여러 초상화와 조성물이 다양하게 비교 전시되어 흥미를 끌었다. 그는 본래 나가사키현 히라도번(平戶藩) 출신으로 무역상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현지처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지만, 명나라 부흥의 신념을 가지고 반청(反淸) 세력을 규합해서 타이난에 정씨왕조 동녕국(東寧國)을 세웠다. 그곳에 이미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던 네덜란드 세력과 전쟁을 벌이면서 원주민과 이주 한인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나갔다. 이미 거대한 규모의 해군 상단을 거느린 국제 무역상의 면모를 띠었지만, 오늘날까지 여러 시각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었다. 정씨정권은 25년을 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심지어 관우와 같은 무신 혹은 재신의 초상으로 묘사된 그림과 동상까지 있었다. 어떤 대만 역사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 경영을 종식시킨 그의 공적이 “향후 4백 년 간의 타이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다음 구역은 더욱 놀라운 상징물을 보여준다. 남색 바탕에 그려진 누런 줄범의 깃발 ‘남지황호기(藍地黃虎旗)’ 한 쌍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유리창 반사로 얼보이기는 하지만 얼른 사진을 찍었다.

 

   몇일 전 시먼팅(西門町) 근처에 숙소를 잡고 산책하며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광장을 거닌 적이 있었다. 그곳은 젊은이들의 핫한 관광지에서 한걸음 비껴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역사 공원이다. 한때 거창했던 일본 최대의 사찰 니시혼간지를 본떠 지었던 본당의 유허(1970년 화재소실) 기단에 콘크리트 건물을 들여서 “대만시립문헌관(臺灣市立文獻館)”을 운영하고 대만의 근대사 자료들을 무료 전시하고 있다. 또한 인도를 접해서는 대만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담장에 부조로 새겨놓았다.

      

          

 

   이를 통해 볼 때 대만의 역사는 17세기 전후로 판이하게 나뉨을 확인할 수 있다. 대만은 16세기초까지는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이 자립하면서 공존하는 섬이었다. 따라서 원주민의 민속사에서 거의 벗어날 일이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은 명제국을 중심으로 유구(琉球) 왕국이 중개하며 번성을 누렸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대만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구 열도의 남쪽 끝에 덩그라니 위치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자 서세동점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유럽 7개국의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맏형 격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타이욘(臺員)에 질란디아를 구축하여 식민지 무역 거점으로 삼으면서 중국 최남부 광동(廣東)과 동남아시아를 연계하는 대만 해협 일대가 서방의 해상무역권으로 재편됐다. 또한 만청(滿淸)의 신흥 제국에 대항했던 남명(南明)의 최후 정착지가 정씨 왕국의 타이난 지역이 되었고, 이해 관계에 따라 청 조정은 서구와 연합하면서 대만을 중세적 책봉체제로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게 됐다. 18세기 청의 번성기를 거치면서는 대만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변방으로 한 세기 반을 별일없이 지냈다.

   반면에 19세기 말엽 일본은 중세 책봉체제에서 벗어나 근대 민족국가 형태로 전환하고, 치열한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분할 경쟁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첫 번째 결실이 청일전쟁의 승리였고 협상 결과 대만과 펑후(澎湖) 제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청조의 관리와 대만인들은 조선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만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했고 공격하는 일본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청일전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삼아 청일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발발했고, 1895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던 때 끝나지 못하고 1896년 3월 대만에서 일본의 군사행동이 종결된 때까지 근 2년간 지속됐던 것이다. 이 사이에 대만은 잠시나마 독립 국가의 꿈을 꾸었지만 지도부가 3개월만에 중국 본토로 망명함으로써 국가체제가 와해됐다. ‘남지황호기’의 범은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결기를 지녔다기보다는 하늘 용의 돌봄을 기대하는 국지적 맹수였을 뿐이다.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중세적 제국은 무력을 갖추고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근대이행기 제국주의적 민족국가를 꿈과 상징만 가지고 이길 수는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종주권을 주장했던 청나라 조정의 적극적 개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대만인은 ‘민주국’ 꿈의 씨앗을 땅속에 흩뿌렸어야만 했다.

   대만 근대사의 자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공간으로는 단수이(淡水)가 있다. 단수이 강물이 대만의 서북쪽을 가로질러 대만해협으로 흘러들어가는 광활한 하류에 조성된 마을이다. 일몰이 아름답고 이국적인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대만 드라마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说的秘密)>의 배경 장소여서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타이페이를 중심으로 동북쪽 바닷가에 지룽(基隆) 항과 예류(野柳)·지우펀(九份) 등이 유명하다면, 서북쪽 해안과 큰 강물이 만나는 단수이가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양쪽 모두 전철로 40~5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지룽 항은 일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대규모로 개발되어 오늘날 중화민국 제2의 항구로 성장했다면, 단수이와 타이난은 1858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게 할양된 10개의 항구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러나 단수이 가운데에서도 대만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는 홍마오청(紅毛城)만한 곳이 없다. 17세기에 건축된 서양식 요새이자 외국 영사관으로 기능하였는데, 네덜란드 식민시기, 청제국 시기, 일제 식민시기를 거쳐 오늘날 중화민국 영토로 귀속되기까지 모두 9개의 통치 권력이 이곳을 거쳐갔다.

 

 

   애초 1628년 스페인이 이곳에 성채를 지었는데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쫓아내고 파괴된 구조물 근처에 또 다른 성을 지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홍마오청이라고 한다. 정성공의 정씨왕국 시절에는 단수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이곳에 곡물을 보관했으며, 18세기 청 제국의 통치 시기에는 홍마오청을 보수하고 4개의 성문을 증축했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단수이가 영국에 활양되면서 홍마오청은 영국 영사관이 되고 영사 관할의 지하 감옥까지 갖추었다. 1941년 일본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홍마오청 영사관은 폐쇄되고 종전될 때까지 일본에 의해 관리됐다. 1948년에 영국인이 홍마오청에 돌아왔고, 1972년 영국 영사관이 철수하면서 호주가 대신 관리했다. 그러나 호주가 중화민국과 단교하면서 미국이 위탁 관리하고, 1979년 미중 단교가 이루어지자 1980년 홍마오청은 비로소 중화민국의 소유가 됐다. 식민지 경영, 중세 제국의 변방, 외국 영사관의 영지 등으로 변모해 온 이 성채는 중화민국 시대에도 본토 중국과의 양안(兩岸) 관계로 인해 외교적 단절을 강요 당하면서 결국은 국가 1급 유적지로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수이 강과 강 건너의 관음산을 조망하며 단수이 팔경의 하나인 ‘수대(戍臺) 석양’을 관상하는 일이 일품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주변의 진리대학(眞理大學)과 담강고(淡江高), 소백궁(小白宮)을 유람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만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생활공간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국주의 대일본국은 대만 식민지 경영에 어느 점령지보다도 특별히 공을 많이 들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고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을 점령함에 따라 중화민국이라는 근대 국가가 시작됐지만, 오늘날까지도 식민지 시대의 유물은 한국에 비해 문화자산으로 훨씬 더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타이페이 근교 ‘베이토우(北投) 온천지’이다. 이곳은 타이페이 시내에서 전철로 쉽게 갈 수 있으며 마지막 구간에는 신베이토우(新北投)를 왕래하는 전용 전동차가 연결된다. 별천지를 드나드는 듯한 분위기를 지닌 객차에 몸을 맡기고 온천지에 도착하면 그곳은 하나의 문화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중간쯤 올라서면 숲속에 타이베이 시립도서관 분관이 자리잡아 모처럼 휴식 공간의 깊이를 더해준다. 입장하여 어린이도서를 뒤져보다가 호랑이 그림동화를 여러 책 발견했다. 강연회를 제외하고는 이용자가 어린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랴오슈춘(廖秀春)의 호랑이 고모할머니의 전당포(虎姑婆的當鋪) 같은 것은 흥미로웠다. 현역에서 은퇴하여 사냥을 하지 않고 채식주의자로 변모한 고모할머니가 더 이상 할일이 없어 무엇이나 받는 전당포를 열어서 서민들을 돕는다는 내용이다.

 

 

   대만 타이페이의 야시장에는 언제나 어깨를 부딪힐 정도의 인파가 몰려들고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친다. 우리의 가족 여행 마지막 몇일은 양명산(陽明山) 기슭에 위치한 원산대반점(圓山大飯店)에 묵으면서 인근 스린(士林) 야시장을 두 차례나 방문했다. 시장 한복판에는 세워진 지 200년이 넘은 도교 사원 자성궁(慈誠宮)이 자리잡고 있다. 담장 안의 입구 계단은 간식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휴식 공간으로 아낌없이 내주었다. 사원 안에는 마조(媽祖) 여신을 모시고 인생의 바다를 너끈히 건너기를 기원하는 제단이 중앙과 좌우에 각기 갖춰져 있다.

   인파를 따라 여러 걸음 더 옮기다가 기상천외한 광경을 만났다. 사람들이 저마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위쪽을 촬영하는데, 유독 서양인들도 보이고 유모차를 멈춘 부부들도 보였다. 연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하하호호 웃음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것은 어린 범 스라소니의 동영상이었다. 마치 2층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3D효과의 입체감이 뛰어났다.

 

[스린 야시장에서 만난 ‘국제관광 발전 협회’의 스라소니 동영상]

 

   스린 야시장의 국제관광을 위한 홍보 단막극이었지만 홍보를 앞세우기보다는 흥겨운 스라소니의 한때 모습을 와이드 스크린에 담았다. 장난기 넘치며 실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순진한 태도가 관중의 선한 웃음을 자아냈다. 구운 옥수수를 낚아채려다가 고꾸라지고 제가 싼 똥을 뒷발로 멀리 쳐내버리며 의기양양하다. 졸음에 겨워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비가 날아드니 머리채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다. 나는 약 130년 전에 대만민주국 ‘남지황호기’의 범이 돌아다 본 것은 황제의 나라 청제국이 아니라 바로 이런 순수한 영혼의 후손이었나 반문해 보았다. ‘민주’의 국호를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대만 독립의 꿈을 꾸었다는 의의는 오늘날 중화민국의 대만, 타이페이 스린야시(士林夜市)의 젊은 인파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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