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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필 칼럼니스트

《신편호사(新編虎史)ⅴ》 -21세기에 새로 엮는 범의 역사

「산군의 죄인들」

  오늘날 동아시아는 여러모로 세계사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체제가 구축되는 듯한 외교적 움직임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지구 이해득실의 전선이 첨예하게 충돌할 듯한 조짐으로 느껴진다. 그러한 움직임은 20세기 냉전 대결이 재발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까?

  17세기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한반도의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여러 차례 국제전에 연루되고 싸움터를 내주어야만 했다. 국내적으로는 16세기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전후 수습책을 지속했어야만 했지만, 유교적 명분을 내세운 구테타에 의해 정권이 바뀌고 중국 북방의 신흥국가 후금 혹은 청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 시기 4명의 조선 문인들은 <산군전>이라는 우언 작품을 연달아 창작했다. 산중 통치자가 되기까지도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산군이 되고 나서도 권한과 책임에 따르는 명암이 심하게 엇갈렸다. 범의 등극은 이마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절륜한 용맹함 덕분이지만, 권력의 자리에는 이미 사나움과 잔인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도 나름의 교훈을 찾을 수 있어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중세 질서가 심하게 무너지면서 생긴 균열의 틈새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우회적으로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산군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산군은 성품이 사납고 흉포하다. 친애하는 바가 없어 만물에 해만 끼치는데 화가 나면 더욱 심하다. 그러나 그 새끼만은 몹시 사랑했다.

 

  왕실의 인척이었던 윤신지(尹新之, 1582~1657)은 독후감에서 이 대목에 주목하며 “산군의 성질이 포악 패려해도 자기 새끼는 유독 사랑한다”라고 요약하고, 사람이 그만도 못한 경우가 있음을 한탄했다. 후처에게 미혹되어 아들을 핍박해 죽이고 자기가 죽을 때는 유서를 남겨 며느리를 내쫓고 손자를 해꼬지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례를 들었다. 이런 사람은 ‘산군의 죄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더 이상 번뜩이는 정기도 없는데 그 잘못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는 쌓여온 위세가 아직도 남아서인가? 세상 도리가 그릇되고 인심이 무너져 데면데면 괴이하게 여기지 않아서인가?

 

  범은 먹이감이 두려움에 떨어 꼼짝 못할 때까지 기다려서 잡아먹는다고 한다. 범의 ‘발톱과 이빨’이 무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도구라면, 그보다 앞서 눈동자에서 풍겨나오는 정기는 상대를 주눅들게 만드는 위세의 상징이다. 비평자는 그 ‘어떤 사람’이 일상의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암시하면서 ‘범의 새끼 사랑’을 언급한 <산군전>에 특별한 우의가 곁들여져 있다고 들춰냈다.

  만주 이민족에서 일어난 청나라는 산군처럼 야만스럽고 폭력적이라고 하지만 “범도 새끼 둔 골을 두남둔다”는 속담에 비추어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않았다. 섭정 도르곤은 조카 순치제(順治帝)를 보좌하며 제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렸지만 제위를 넘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권력을 나누다가 사후에 역적으로 몰려 험한 꼴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조선의 인조는 ‘산군의 죄인’이라고 해야 마땅한 짓을 서슴치 않고 했다. 자신은 구테타에 의해 추대된 통치자였던 만큼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이 병적이었다. 청의 인질로 끌려가 심양에서 살아남았던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청 조정의 비호를 받는다고 의심하여 마치 정적처럼 대했다. 또 세자가 영구 귀국하고 두 달여만에 급서한 사건에 있어서도 ‘독살’의 뒷배로 의심할 만한 여러 조처를 취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조는 총애하는 후궁 조씨(趙氏)를 저주하고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어 며느리 강빈(姜嬪)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며, 세손이 되어야 할 손자들까지 제주 유배를 통해 죽음으로 내몰았다. 윤신지는 인조의 고모부뻘 인척 어른이다. 그 정도의 위치에서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운 추악한 부자지간의 사정을 ‘범의 새끼 사랑’에 빗대서 변죽을 울렸다고 할 수 있다.

  인조는 죽은 소현세자의 가족을 몰살하고 동생 봉림대군으로 대통을 잇게했다. 그가 북벌을 모토로 국력강화 정책을 폈던 효종이다. 효종도 또한 소현세자의 동생으로서 심양에 억류되면서 청나라의 정세와 발전된 문물을 체험한 바 있고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벌론은 하나의 정치적 이념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대동법, 시헌력, 군사제도 등으로 대표되는 개혁 정책에 힘썼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청나라 실력자 도르곤의 인정을 받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점이 거꾸로 인조의 의심과 시기심을 자아내는 반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나 만약에 인조가 소현세자를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보위를 순조롭게 넘겼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실제로 이같은 역사 가정법에 근거한 ‘소현세자의 서사’는 <더 킹: 영원의 군주> 같은 문화콘텐츠로 살아났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역사는 과거를 참고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직면한 현실을 그때 그때 어떻게 대응해 나갔느냐를 가지고 평가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17세기 동아시아가 이미 세계사 속에 편입되어 어느 한 나라만으로 고립되어 있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중세 책봉체제에 기반한 가치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새로운 역사 단계에 돌입했다.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감하고 그 남은 군사력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이후 덕천막부의 장기 집권으로 에도 시대를 열었다. 중국은 조일 전쟁 참전의 여파와 농민군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쇠망하고 그 틈을 타서 변방의 만주족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했다. 일본은 지금의 나가사키현 히라도번(平戶藩)과 데지마(出島) 등을 통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활용했고, 청나라는 조선이 서역 문물을 접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히라도 출신 정성공(鄭成功)은 명나라 부흥을 외치며 대만 타이난(臺南)에서 네덜란드를 공격하고 동녕(東寧)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가 대만을 최후 근거지로 택했던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에는 공식적인 조공 무역 이외에도 일본, 필리핀, 베트남과 유럽 국가들에 의해 해상 무역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권력은 나눌 때만이 균형과 절제를 통해 안정화된다. 창세신화에서 아홉 개의 해와 달을 화살로 쏘아 하나씩만 남겨둔다는 이야기는 더위와 추위를 조화롭게 조정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균형과 절제를 통해서만 해와 달도 제 구실을 온전하게 하며 조화로운 세상의 원천이 된다.

  권력은 위로 쌓아올리면서 힘을 집약시키지만 아래로 나누면서 효용의 저변을 넓힌다. 교역은 재화와 물력을 나누는 수단으로서 순기능을 지닌다. 또한 가족관계에도 권력의 양방향이 존재한다. 범의 가족은 어떠한가? 우리는 <유호도(乳虎圖)>의 변형인 <까치호랑이> 민화를 통해 위엄을 갖추면서도 인애로운 범의 모습을 감상한 적이 있다. 그 부모 아래에서 여러 종류의 범새끼들이 커간다. 볼품 없는 스라소니가 그 속에 끼어 있어도 자연스러운 가족 관계를 이룬다.

 

 

 

 

 

 

 

 

 

 

 

 

<호족도>(虎族圖_壇垣筆) -지본채색, 57×134㎝, 에밀레박물관 소장, 조자용, 한호의 미술, 227쪽)

 

 

 

 

 

 

 

 

 

 

 

 

  박수현(朴守玄, 1605~1674)은 <산군전>에서 산군을 마치 폭군 주왕(紂王)처럼 묘사했다. 백성들을 벌벌 떨고 머리를 처박게 만들었던 것처럼 뭇짐승들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같은 포악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새끼의 관계에서는 예외적임을 다시 지적했다. 위 그림으로 보자면 줄범 새끼까지 끼어든 돈범 가족이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흔히 호표(虎豹)로 통칭하는 범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한국 민화의 <호족도>에서는 자연 생태계에서와는 다르게 줄범과 돈범을 섞어서 그려놓는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하늘이 부여해 준 치우진 본성이 있다. 따라서 산군이 먹잇감만을 탐내는 짐승이라 말할 수는 없다. 춘추시대 큰 도적이었던 도척도 인의(仁義)를 품부받았다는 말이 헛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이리 울음소리를 내는 아들을 낳게 된다면 모두들 “반드시 털 달린 짐승들을 멸망시킬 놈이다.”라고 말할 것이니 매우 밉살스럽다.

 

  산군을 주인공으로 삼아 언급한 것이지만 이는 오히려 인간을 빗대기 위해 에둘러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모 자식 사이의 정은 보편성을 띤 윤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자식이 잘못 태어나 집안을 망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범 가족에 이리는 끼어들 수 없다. 이는 줄범과 돈범의 허용치를 넘어선다. 17세기 작가들이 목도한 광해군의 패륜적 행위,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으면서도 세자를 정적으로 취급하여 족멸(族滅)에 이르게 하는 인조의 비정함은 이 작품의 현실적 우의가 될 만하다. 그들은 산군의 죄인들이다.

  최수현은 <산군전>의 사평(史評)에서 산군의 효용성을 전혀 다르게 제시한다.

 

   산군은 짐승 도살업에서 몸을 일으켜 타고난 봉작인 양 후왕(侯王)과 동등한 칭호를 지녔으니 거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위세가 있다. 기이하구나! 바야흐로 그가 산모퉁이를 등지고 있으면 병사 어느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고, 산에 거할 때이면 명아주잎과 콩잎도 그를 호위한다. 그 기세가 당당함을 보건대 비록 만승 천자의 위엄일지라도 어찌 여기서 더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자가 있어 구중궁궐이나 지키게 하지 말고 사방 국경을 막아낸다면 백료(百獠)의 뭇 이민족 다루기를 수많은 양떼 몰 듯이 할 것이다. 한로(韓盧)같은 날랜 사냥개가 변방 토끼를 잡는 정도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범은 뭇짐승 잡아먹는 짓을 일삼는다. 마치 도살업을 가업으로 삼은 듯한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라는 말이다. 따라서 ‘산군’이라 불리는 것은 그 타고난 사나움 덕분이다. 산 구석 한 모통이에 웅크리고 있으면 병사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그에게는 하찮은 풀숲도 은신의 도구가 된다. 찬탈하거나 참람되게 산군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는 인간 세계에서 어떠한 지위를 얻어야 마땅한가? 기껏해야 제왕의 호위 군사로 써먹는 것은 하책이다. 옛부터 최정예 군사를 가려뽑아 호분씨(虎賁氏)니 여분씨(旅賁氏)니 일컫었던 전례가 있다. 삼국시대 조조(曹操)는 최정예 친위 기병대 호표기(虎豹騎)를 두어서 부대 지휘권을 가장 신임하는 조씨 장수에게 맡기고 최후에는 본인이 직접 관장했다. 그는 삼국시대의 주요 전투에서 이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전쟁의 판세를 뒤집어 놓곤 했다.

 

 

  그러나 위의 <용호상박도(龍虎相搏圖)는 산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신묘한 변화를 타고 하늘을 나는 쌍룡에 대항하기 위해 돈범과 줄범은 연합전선을 폈다. 한치도 물러설 의사가 없는 용호상박의 기상이 조금도 구석진 데가 없다. 이러한 그림을 그려놓는 곳은 삿된 것을 막고 경사스런 일을 들이는 대문간이겠으나, 국방에도 그러한 산군의 용맹과 기상이 필요하다. 대권을 지키거나 차지하는 데 골몰할 것이 아니라 변방 너머로 눈길을 돌리라고 박수현은 권고한다. 타고난 용맹을 지닌 자들을 오랑캐들의 준동을 제어하고 청나라와 같은 제국의 흥기에 대응하는 데 써먹어야 한다는 속뜻이 있다.

  여기서 ‘백료(百獠)’라 함은 만주족 청나라의 모집단이자 대립 관계에 놓여 있는 조선 북방의 여러 새외 이민족을 암시한다. 원래 한문 고전에서는 ‘산료(山獠)’라는 어휘의 용례가 많이 발견된다. 중국은 동이(洞夷)이 함께 주로 장강 이남의 원주민을, 한국은 한반도 북변의 야인들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었다. 사냥이나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비문명권의 야만인을 멸시하는 가치 판단이 포함된 어휘이다.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의 <산군전>에서는 폭군으로 타락한 산군이 이들 ‘산료’들의 반란과 사방에 모여 든 ‘제료(諸獠)’들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 산군의 나라를 만청(滿淸)에 대입해 본다면, 무력으로 노호(老虎)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했지만 언젠가는 어떤 다른 북방의 오랑캐들의 결집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고 내다본 셈이다.

  그러나 정두경의 <산군전>에서 보듯이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조선의 정권도 산군의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광해조는 간언하는 신하들을 탄압하며 패륜 정권이라는 족쇄를 감수해야 했고, 인조는 권좌에 집착했으며 반정 공신들은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통치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광해조의 집권당이었던 대북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유몽인 같은 명망가도 단지 광해조의 고위 관리였다는 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황중윤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주화론을 폈던 광해조 문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10년간의 귀양살이를 당했다. 박수현은 6품관 벼슬에 그친 소북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을 뿐이다. 인조의 외교 노선은 정묘호란 때 미봉책에 그쳤고 병자호란의 정신적 상흔과 외교적 과오를 온통 견뎌내야 할 만큼 문제적이었다. <산군전>의 우의는 일찌감치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권력 집단의 정통성과 통치력 등에 대한 우의를 담을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효건(崔孝鶱, 1608~1671)의 <산군전>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산군을 설정했기 때문에 입전 대상이 여럿이다. 그 가운데 여충(戾蟲)과 소위(素威)는 부정적 인물과 긍정적 인물을 대표한다. 물론 범의 별명 가운데 하필 그러한 이름을 선택한 것 자체가 그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타고난 위엄’의 소위는 웅공(熊公)의 참칭에 분격하여 정벌에 나서고 모공(毛公) 등이 그에 호응하여 승리를 거둔 후에 산군으로 추대되었다. 공로에 따라 여러 짐승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었지만 병권만큼은 자기 동족이 틀어쥐었다. 그러나 소위의 통치는 공신들의 호가호위와 교언영색으로 인하여 권력에 도취된 폭군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에 아들 변(變)이 왕도 정치로의 회복을 간언하며 종친을 분봉하여 권력을 나누라고 제안했다. 소위는 이를 수용함으로써 서사가 반전된다.

  이같은 반전은 위엄 속에 포함된 수직적 질서를 어느 정도 수평적 질서로 하방화하는 분권(分權)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속뜻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주역 혁괘(革卦)에서 언급한 대인호변(大人虎變), 군자표변(君子豹變)의 뜻이기도 하다. 대인이 통치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 군자가 늘 선을 좇아 변화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다. 마치 줄범, 돈범이 은인자중의 털갈이를 통해서 가죽의 아름다움을 빛내듯이.

  최효건은 소현세자의 급서 탓에 갑자기 대통을 이은 효종의 조정에서 지방관을 전전했던 문인관료이다. 그는 다른 글에서 달라진 시대에 걸맞게 통치의 기본 덕목으로 지·인·용(智仁勇)을 전제하면서 특히 의리에 부합되는 조치를 과단성 있게 취하는 용기를 지니라고 임금에게 주문했다. 또 무기의 이치는 천지 싸움 이전에 존재했으며, 천지가 싸움을 하면서 음양이 생겨나고, 천지가 싸움한 이후에 우뢰와 바람이 충돌했다는 주기론적 사유를 펴기도 했다. 결국 치란은 상호 연계되며 문무 어느 하나가 홀로 쓰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기는 가치 중립적 도구이면서도 흉기이므로 성인의 어진 마음으로 부득이하게 사용하는 것인데, 후대에 이를 구실 삼아서 나라를 훔치고 형제를 죽이는 일은 살벌지심(殺伐之心)이라고 경계했다. 인조, 효종, 현종조에 이르는 17세기 조선은 무용의 가치와 권력의 이동에 대한 사유를 진지하게 펴야 할 만큼 대내외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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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훈, 「소현세자의 사인(死因)에 관한 고찰」, 대한 한의학원전 학회지 19-3(2006) 참조.)

2) 이명제,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과 역사 속의 소현세자, 역사와현실 125(한국역사연구회, 20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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